개인전
2011 김병칠 관조의 세계-파리전(프랑스 파리, 89갤러리)
EVE갤러리 초대전(서울, EVE갤러리)
2010 관조의 눈으로 바라본 내적 풍경(서울, 인사아트센타)
2009 MANF15!2009 서울국제아트페어(부스전)(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08 Eye to Eye (서울. 목인갤러리)
2003 여백을 통한 경향성의 표현 (서울, 백송갤러리)
단체전
2011 퀼른 Art Fair 21(독일 퀼른, Staatenhaus am Rheinpark)
‘반복- 사유의 흔적’초대展(갤러리 자리아트)
한벽동인전(한벽원 갤러리)
아름다운 서산전(서산 문화회관)
Good Moing 2011전(갤러리 라메르)
2010 송년감사 초대전 (갤러리 바이올렛)
아름다운 나눔전(갤러리 M)
한국미술 100인 100색전(갤러리 바이올렛)
58인의 작은그림 초대전(서산갤러리)
먹내음을 가슴에 안고(역삼문화전시관)
2009 서울-동경전(갤러리 YUL)
안견회화의 정신전(갤러리 도올)
‘꽃, 여인...그리고’기획초대전(갤러리 아이)
2008 Complimentary Exhibition of ‘Light of Korean Art’ (Italia Milano Artcenter)
대자연전 (광화문갤러리)
낙산에서 인사동전 <한성대 동양화 동문전> (조형갤러리)
2007 서미회전 (서산시 문화회관)
한성대 개교35주년 기념 회화제 (한성대학교 미술관)
2006 대자연전 (공평아트센타)
낙산에 머물다전 <한성대 동양화 동문전> (조형갤러리)
진도그림여행전 (진도 운림산방)
2005 한국-이집트 수교10주년 기념 교류전 (카이로 미술전시관-Palace of Arts)
대자연전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한국미술의 미래전 (해청미술관)
아름다운 서산전 (서산시문화회관)
2004 유어필묵전 (백악미술관)
서미회전 (서산시 문화회관)
낙산에 오르다전 <한성대 동양화 동문전> (조형갤러리)
2003 연그림전 (한강 시민공원)
문인화정신 그리고 기운생동전 (공평아트센타)
2002 international flag art festival (상암동 월드컵공원)
월드컵축하 연그림전 (상암동 월드컵공원)
한국화의 정신과 표출전 (조형갤러리)
문인화 정신의 부채바람전 (공평아트센타)
색과 묵의 흐름전<한성대 동양화 동문전> (세종문화회관)
2001 신춘 연그림전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깃발 미술제<월드컵전람회> (여의도공원)
문인화 정신의 새로운 향방전 (공평아트센타)
2000 평화의 연그림축제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뉴밀레니엄 코리아토탈아트 초대전 (동아갤러리)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기금마련전 (영등포 문화예술회관)
문인화정신의 한마음전 (공평아트센타)
1999 하늘에 띄우는 연그림전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문인화정신의 본향전 (공평아트센타)
아리랑축제 깃발미술전 (정선군 강변특설전시장)
한-러교류 깃발미술제 (여의도공원)
현재 : 한국미술협회, 동방예술연구회 회원
Introduction 작품소개
<평론>
관조의 세계
작가 김병칠은 인생이 성숙된 30대에 그림의 세계에 입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회사의 직장인으로 근무를 하다가 퇴직하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求道者(구도자)의 모습으로 畵道(화도)에 진입한 것이다. 작가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나에게 있어서 조형작업은 修行(수행)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고 진술하면서 “나에게 그림은 전부다”라는 표현으로 그림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고 있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로서 觀照(관조)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관조의 세계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實相(실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관조의 눈이란 感覺(감각)의 눈, 理性(이성)의 눈과 변별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감각의 눈이란 개념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본능적으로 知覺(지각)을 얻는 것이고 둘째 이성의 눈이란 감각적인 지각의 내용을 반성하고 개념화하여 대상을 認識(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어서 주체의 思惟(사유)에 의한 觀念(관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셋째의 觀照(관조)의 눈이란 主客(주객)을 초월한 제3의 눈이다. 그러므로 佛敎(불교)에서는 이 제3의 눈이 작용하는 것을 본다(見)고 표현하지 아니하고 觀(관)이라든지 觀照(관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가 觀照(관조)의 눈을 통하여 추구하는 觀照(관조)의 세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먼저 작가가 의존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전개하고 있는 그 觀照(관조)의 눈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觀照(관조)의 눈이란 主體(주체)가 대상을 認識(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主客(주객)을 초월하여 존재의 實相(실상)을 체험하는 것이다. 만유는 生滅(생멸)이라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지속하고 있지만 무엇 하나 고정불변한 實體(실체)란 없다. 그러나 이 無常(무상)한 존재의 구조는 독립된 實體性(실체성)이 없이 서로가 依存關係(의존관계)에 의하여 이 대자연의 표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표정이란 고정된 실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지만 그 현상이 부정될 수 도 없다. 그리하여 작가는 이러한 표정의 원천을 이루는 마음의 세계를 조형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그의 <작가노트>에서 “나의 작업은 존재의 진실인 마음, 관계, 생멸의 조형적 표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김병칠이 표현한 화면에는 어떤 중심적 表象(표상)이 없다. 동시에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형태들은 실체로서의 고정성을 지니지 아니하고 존재의 흐름 속에 엉클어진 관계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화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닥지 위에 채색된 필선들은 존재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으며 거기에 떠오른 형태들은 개별적인 고유성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가 의존하여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 작품의 화면에서 새와 꽃, 산과 나무, 집과 동물, 건물과 달, 탑과 비석, 연못과 물고기 등 온갖 존재의 표상들이 집합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어떤 異物感이라든지 對立의 정서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화로운 존재의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 마치 無常(무상)한 표상들의 교향악을 듣는 것 같다.
작가가 구성한 이들 화면은 작가가 觀照(관조)한 實相(실상)의 세계를 색과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情念(정념)을 자극하는 욕망도 나타나 있지 않고 또한 흔히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주장하는 어떤 개념적 내용도 지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김병칠의 작품에서는 평화로움이 느껴지며 이기적인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 <나>와 他者(타자) 사이의 交感(교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부터 자극을 받아 환기된 미적 정서가 아니라 존재의 實相(실상)에 합일하는 생명의 공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계주의와 상업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그의 그림이 기여하는 훌륭한 메시지가 되리라고 믿는다.
김 구 산 미술평론가/철학박사
<작가노트>
마음, 관계, 생멸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과 세상의 존재에 대하여 가끔은 의문을 가져보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답답함에 대하여 깊은 사유와 성찰로 풀어보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의 작업은 이 답답함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기위해 떠나는 구도자의 여정에서 출발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변화한다. 다만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자기>라는 폐쇄된 의식에만 지나치게 함몰되어 전체의식의 순수성과 공존성을 보려고 하지않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전체의식의 순수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이다.
나는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평소에 간과하고 지나쳐버리는 전체의식인 순수의식을 <주객합일>을 통하여 관조의 눈으로 이해하고 느껴보고자 한다. 나의 작업은 존재의 진실인 마음,관계,생멸의 조형적 표현이다. 존재의 바탕인 질료로써의 의미를 가지는 <마음>과, 질료에 어떤 조건과 <관계>의 상황이 주어지면 형상으로 드러난다. 주어진 조건에 의하여 생성된 형상은 <생멸>을 반복하며 변화한다. 이러한 합일의식을 체감하기 까지의 과정을 조형작업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한다.
오감의 접촉을 통하여 보고 느낄 수 있는 형상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또한 형상은 어떤 조건과 상황을 만나면 새롭게 만들어지고 소멸한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오감과 생각을 통하여 접촉 할 수 없는 부분이 모든 형상의 바탕인 마음이다. 이는 접촉과 생각의 이원적 사고를 통해서는 도저히 체감 할 수 없는 초월의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만 가슴과 몸으로 스스로 그러함을 감지하고 느낄 뿐이다. 보통 이 부분을 종교에서는 진여(眞如) 혹은 영성(靈性)이라는 의미로 표현 한다. 순수의식을 체험하고 보면 이 세 부분은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시간속의 초월의식(관조의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이 세 부분을 작업속에 투영시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존재의 진실을 이해하고 느끼게 하고 싶다. 이러한 나의 작업여행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